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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한국 위인 고려시대 화약 발명가 최무선(崔茂宣) 누구인가.

by 온맘 다해 다 퍼주는 비전나누미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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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위인 최무선(崔茂宣) 화약 발명 업적 알아보자.

위인 최무선(崔茂宣)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한국 역사 최초로 화약 개발에 성공하였다. 고려시대 왜적의 침입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화약 무기의 필요성을 깨닫고, 원나라의 염초 제조법을 기반으로 하여 화약을 만들어 왜구를 격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화약 발명가 최무선(崔茂宣)은 누구이고, 어떻게 화약을 발명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화약 제조 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겠다.

최무선(崔茂宣) 생애 및 시대적 상황 살펴보자.

최무선(崔茂宣)은 1325년 영주(지금의 영천)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천성이 기술에 밝고 병법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렸을 때 불꽃놀이를 보고 폭죽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화약 무기에 관심을 갖고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연구하였고, 중국어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고려 백성들은 왜구의 노략질에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1351년 왜구는 고려 전국을 약탈하였다. 고려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동원했지만, 해상에서 저지하지 못해 왜구들은 해안은 물론 내륙까지 상륙하여 막대하게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화약 개발에 전념했다.

위인 최무선(崔茂宣) 화약 무기 개발 배워보자.

화약을 만드는 데에는 유황, 숯과 함께 염초가 핵심원료로 필요했는데, 고려는 그것을 제조하는 기술이 없었다. 중국이 화약 제조법은 철처히 국가기밀로 숨기고, 완성된 화약만 주변국에 판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무선(崔茂宣)은 이 어려운 염초 제조 기술을 익히는 데 성공하였고, 보급하는 공로를 세운 것이다. 그는 중국의 화약과 화포 기술서를 모아 분석한 후 직접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만나서,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그는 원나라 사람인 이원을 만나 지극한 정성으로 이원을 감동시켰고, 결국 그에게서 염초를 제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화약 무기 연구를 위해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하였고, 몇 번의 건의 끝에 허락받았다.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무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화기들은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육화석포 등 18가지가 있다. 1378년에는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기를 발사하는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이 편성되었다.

위인 최무선(崔茂宣) 발명품 화약 무기 성과 살펴보자.

1380년 왜구는 500여척을 이끌고 금강 후구의 진포로 침입해 왔다. 최무선(崔茂宣)은 상원수 나세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가지고 나갔으며, 처음으로 화통과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 선박을 격침시켰다. 1383년 왜구가 또다시 남해의 관음포에 쳐들어 오자, 그는 이번에도 화기를 사용하여 왜선을 격침시켰다. 화약무기 사용 이후로 왜구의 침입은 크게 줄고 백성들의 생업이 회복되었다. 1389년 화통도감이 철폐되었고, 그는 화약수련법, 화포법을 저술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그를 높였다. 그는 태조 4년에 사망하였고, 태종 1년에 조정은 그의 공을 참작하여 의정부우정승, 영성부원군을 추증하였다. 그의 아들 최해산은 대를 이어 화약 무기를 개발하였는데, 수레에 화기를 장착하여 적을 제어할 수 있는 화차를 개발하였다.

위인 최무선(崔茂宣) 남긴 업적 알아보자.

그가 화약 무기 자체 개발에 성공한 이후, 화약 무기는 왜구를 진압하고 방지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국산화시켰고, 화포와 전함과 화약 무기를 독자 개발하여 왜구와의 전투에 사용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화기와 화약 제조 기술이 더욱 발전되었고, 대량으로 생산되는 기틀이 마련되게 되었다. 첨단 화약 무기를 개발해서 왜구를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지킬 수 있게 만든 최무선(崔茂宣)은 위대한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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