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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한국 위인 문익점 목화재배 및 보급 업적 알아보자.

by 온맘 다해 다 퍼주는 비전나누미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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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문익점 목화재배 성공 및 보급 활약상 알아보자.

문익점은 고려 후기에 목화 종자를 도입하여 시험 재배에 성공하였고,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목화섬유를 이용하여 의복을 제조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여와 재배하여 성공하고 의류를 만들게 된 시대적 배경과 업적을 알아보겠다.

문익점 성장 과정 살펴보자.

문익점은 1328년 경남 산청에서 아버지 문숙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열두 살에 대유학자 이곡의 제자가 되었다. 1360년 32살에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서 벼슬길에 올랐다.

문익점 당시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알아보자.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혼란한 시대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보니, 원나라와 마찰을 빚었다.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홍건적이 발흥하여 고려에 두 차례 침략하였고, 고려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1363년 그가 사간원 좌정원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이공수를 따라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원나라에는 고려인 최유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원나라에서는 높은 관직을 고려 사신들에게 주면서 회유하였고, 문익점도 이때 관직을 받았다.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과 함께 요동까지 진군했지만, 1364년 패하게 되었다. 덕흥군이 패배하자 그는 고려로 돌아왔지만, 이 것이 문제가 되었고, 더 이상 관직생활을 할 수 없었다.

위인 문익점 목화재배 및 보급 배경 배워보자.

그는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종자를 숨겨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겨우 한 그루만 살렸지만, 노력 끝에 삼 년 만에 성공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목화씨에서 어떻게 실을 뽑을지 몰랐는데, 정천익 집에 머물던 중국 승려 홍원에게서 실을 뽑는 법과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베를 짜게 되었다. 이것은 이웃 마을에 전하여졌고, 10년이 되지 않아 전국에 목화 재배 기술과 물레로 실을 뽑는 방법이 보급되었다.

위인 문익점 업적 평가해 보자.

문익점이 목화 재배를 성공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의류 원료는 삼베, 모시, 명주가 대부분이었다. 소수 상류층만이 값비싼 비단을 입는 상황이었다. 그의 공로로 인하여 목화재배는 빠르게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목화 생산은 기존 의류 원료에 배해 생산이 쉽고, 보온성도 뛰어났다. 모든 백성들이 목면으로 만든 의복을 입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의생활과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375년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조선 건국에 반대하자 탄핵을 받고 이후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후세에는 높은 평가와 사랑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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