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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고려시대 한국 위인 충신 정몽주 일편단심 배워보자.

by 온맘 다해 다 퍼주는 비전나누미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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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생애 및 일편단심 살펴보자.

정몽주는 고려말 충신 중의 충신이다. 그는 문신이자 외교관이고, 유학자이다. 고려에 새로 도입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였고,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받았다.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를 개혁하려 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처형되었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는 누구이고, 그의 고려 향한 일편단심은 어떤 의미를 주는지 함께 살펴보겠다.

고려 위인 정몽주 출생 및 정계 진출 알아보자.

포은 정몽주는 1338년 1월 13일 경북 영일현에서 아버지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었는데, 그를 낳은 후 이름을 몽란이라고 지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는 꿈에서 중국의 주몽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후일 이름을 몽주로 바꾸게 되었다.

 

그는 그의 선조들이 대대로 관직에 있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 암기력이 좋았고, 책을 열심히 읽는 등 비범하였다. 1357년 국자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는 이색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문하에서 정도전을 만나게 되었다. 정도전과는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사상을 품고 서로 협력하다가, 후에는 적이 되었다.

정몽주 용기있는 행동 살펴보자.

김용의 간계로, 공민왕은 홍건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을 제거하였다. 백성들은 김득배의 목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했지만, 신하들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모두가 침묵할 때, 몽주는 김득배의 무고함을 왕에게 청하고, 시체를 거두어 수습한 뒤, 제문을 지어서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위인 정몽주 고려말 대외교섭 책임졌다.

정몽주는 문신이지만, 무장으로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외교문제도 주도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명이 건국되자, 고려와 명의 관계를 시작하고 지속하는 과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일본에 파견된 그는 고려와 일본의 이해관계를 잘 설득하여 왜구 방지를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는 등 외교분야에서 탁월함을 발휘하였다.

충신 정몽주 고려 향한 일편단심 배워보자.

정몽주와 이성계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공양왕의 즉위 이후 그는 이성계의 야욕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그에게 자신들과 새로운 나라를 함께 이루자는 시조 하여가를 건넸다. 그러자 몽주는 화답으로 단심가를 읊었고,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을 표하였다.

 

그는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고, 결국 이성계에게 협력할 의사가 없음을 안 이방원에 의해 1392년 선죽교에서 살해당했다. 고려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마지막 수호자를 잃었고, 그를 지지하던 인물들은 유배 및 탄압이 가해졌다. 결국 공양왕은 왕위를 내려놓았고, 500년 고려왕조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충신 정몽주 업적 평가해 보자.

정몽주는 고려말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어떤 큰 일도 사리에 맞게 처신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사행정을 바로 하였으며, 황산대첩에도 참전했고, 일본에서 포로를 데려오는 등 나라를 위해 실질적으로 일을 하였다. 그는 끝까지 고려를 배신하지 않고, 고려를 지키고자 했고 충절을 다했다. 조선 건국 세력에 동참했다면, 부귀영화가 주어졌겠지만, 그는 고려 향한 일편단심을 선택하였다. 현대인들은 그의 단심가를 읊을 때, 충절과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정신을 배운다. 일편단심 고려 향한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정몽주는 현대인과 현대 정치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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