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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조선시대 한국 위인 다산 정약용 사상 배워보자.

by 온맘 다해 다 퍼주는 비전나누미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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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 사상 및 업적 알아보자.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호는 다산이다. 그는 조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실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의 대가로 칭송받는다. 그의 사상과 업적은 후대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은 무엇이며, 업적은 어떠한지 알아보겠다.

다산 정약용 생애 살펴보자.

정약용은 1762년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마현에서 태어났다. 10세에 부친에게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고, 15세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학문에 매진하던 중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정조대왕을 만나 총애를 받고, 28세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교육을 받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고 10년 동안 관직을 두루 연임하면서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적인 공격이 거세지자 1800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신유옥사 때 유배를 가게 된다. 그는 유배기간을 학문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여,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해배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평생 지은 저술들을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그는 1836년 75세에 별세하였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 사상 살펴보자.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조선 후기에 대표적 개혁사상가이다. 실학은 사회적 혼란기에 통치이념으로써 제 구실 못하는 주자학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였는데, 그는 기존의 성리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실학의 기반을 확립을 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정주학에서 벗어나 독자적 학문을 수립하였다.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였고, 당시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의 질서를 새롭게 하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 남긴 업적 배워보자.

정약용은 조선 실학의 대가로서,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였고, 민본적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으며, 토지제도 개혁안을 마련하였고,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였다. 유배시절 그는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확인하고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사상을 포괄하는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집필하고 27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그는 정치 외에도 영농기술 개발 등 과학과 기술, 건축에도 업적도 남겼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하기 위하여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하였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거중기를 고안하여 수원화성을 건설하는데 공사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을 높였는데, 이 수원화성은 후대에 많은 교훈을 주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실용적인 학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조선시대 진정한 대학자였고, 그의 사상과 업적은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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