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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신라시대 한국 위인 김유신 삼국통일 활약상 알아보자.

by 온맘 다해 다 퍼주는 비전나누미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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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삼국통일 달성 김유신 장군 활약상 살펴보자.

김유신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이며 신라의 정치가이자 명장이다. 진평왕에서 문무왕까지 5명의 신라 왕 아래에서 백제의 대침공을 여러 번 막아내고,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를 지켜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낸 신라의 위인이다. 김유신의 생애와 삼국통일 활약상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김유신 출생과 태몽 알아보자.

삼국사기에 김유신은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건복 12년에 신라에 귀순한 금관가야 왕족인 김서현과 신라 왕족인 어머니 만명에게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서현은 두 개의 별이 아버지의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어머니는 황금갑옷 입은 동자가 구름 타고 내려와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잉태한 지 스무 달 만에 유신을 낳았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용맹 떨친 김유신 배워보자.

유신은 609년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를 중심으로 조직된 화랑단의 이름을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 18세 때 검술을 익혀 국선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시절이었는데, 진평왕 51년 35세에 아버지 김서현과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의 역습으로 불리했지만, 세 번 적진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적장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와서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렸고, 결국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김춘추와 김유신 관계 알아보자.

유신은 김춘추와 많은 활동을 펼쳤다. 선덕여왕대에 김춘추는 유신의 누이 문희와 혼인했다. 642년 신라는 백제 의자왕에게 낙동강 서쪽 40여 성을 빼앗겼고, 이어서 대야성을 함락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자, 김춘추는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에 의해 억류당하자, 유신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춘추를 구출하고자 하였다. (열전에는 3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신라군이 북진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김유신 장군 백제 전투 승전 살펴보자.

647년 선덕여왕이 위중하자,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김춘추와 함께 유신은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왕위에 계승시켰다. 김춘추는 당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유신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하였다.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는데, 이때 포로로 잡은 백제 장군과 김춘추의 딸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전투에서 백제성을 빼앗으며 승전하였다.

김유신 장군 백제 병합 성공하였다.

654년 진덕여왕이 서거하고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다음 해 김유신은 김춘추의 셋째 딸과 혼인하여, 두 사람은 중첩된 혼인관계가 되었다. 660년 그는 최고 관직 상대등에 승진했고, 신라군 5만 명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의 5천 병력과 치열한 전투 끝에 백제를 멸망시켜, 백제 병합에 성공하였다.

한국 위인 김유신 장군 삼국통일 공헌 알아보자.

백제 멸망 직후 태종무열왕은 사망하고, 외조카이자 처남인 문무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668년 신라는 당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유신은 직접 전투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고구려 멸망 후에 문무왕은 삼국통일에 유신이 크게 공헌하였다고 하여 최고 관등을 새로 만들어 승진시켰다. 673년 79세에 사망하는 순간까지 그는 충신의 역할을 다했다. 김유신은 국가적 위기에 처한 신라를 지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신라시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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