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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고려 위인 최영 장군 활약상 알아보자.

by 온맘 다해 다 퍼주는 비전나누미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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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최영 장군 활약상 배워보자.

최영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그 당시 정치적 격변기였고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입해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최영 장군은 홍건적의 난과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대단한 공을 세웠고,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켜낸 위인이다.

최영 장군 출생 알아보자.

최영은 1316년에 출생하였다. 집현전태학사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으로서, 최원직의 아들이다. 최원직은 아들이 16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에게 "너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훈을 하였고, 그는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문신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무술을 익히고 병서를 읽어, 무신의 길로 가게 된다.

최영 장군 관직생활 살펴보자.

그는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번 토벌하는 공을 세워 우달치에 임명되게 되었다. 1352년에는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여 호군으로서 출세하게 되었다. 1354년에는 원 조정이 홍건적 토벌을 위해 조정군을 요청하자, 이때 최영은 병력을 데리고 출정하였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온 후 왕명으로 원에게 침식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원나라는 자신에게 등 돌린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자하여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는데, 이 침략을 최영이 처리하였다. 1358년에는 양광 전라도 왜적체복사가 되었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 4백여척을 무찔렀으며, 1365년에는 교동, 강화를 왜구가 노력질 하자, 동서강도지휘사로 왜구를 대적하였다. 그런데, 공민왕 14년 왜구가 창릉에 침입하여 세조의 어진을 훔쳐갔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계림부윤에 좌천되었다. 그러나 1371년 다시 소환되어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최영 장군 활약상 알아보자.

1374년 제주도에서 묵호의 난이 일어났을때 진압을 하였고, 1375년에는 홍산에서 대규모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다녔을 때, 최영은 논산의 개태사로 올라오는 왜구를 크게 무찔렀고, 철원 부원군이 되었다. 이 후로 왜구는 그를 백수최만호라 하면서 무서워하게 되었다.

 

1377년에는 서강에 쳐들어온 왜군을 무찌르고, 1378년에는 왜구가 쳐들어와 개경까지 위태하였을 때, 이성계 등과 왜구를 섬멸시켜 안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90년은 왜구의 침약으로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최영은 천도계획을 반대하고 철회시켰다. 그는 거듭된 전공으로 우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최영의 최후 알아보자.

1388년 최고벼슬인 수문하시중이 되었고, 우왕의 장인이 되어 고려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 명은 철령 이북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고, 최영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고 요동 정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고, 조민수와 손을 잡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돌아왔고, 최영은 이성계와 맞서 싸우다 유배당한 뒤,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위인 최영 장군 평가해 보자.

최영을 제거하고 조선 개국을 주도한 이들도 그의 공적과 평판을 인정하는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그시대 그가 얼마나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청렴하고 우직하고, 용맹하고 준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오래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지만,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고, 큰 일에만 힘을 쏟고, 재산 늘리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의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크고 위대하였다. 최영 장군은 민간 무속신앙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로 숭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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